어릴 때 제게 활명수는 조금 이상한 약이었습니다. 뭘 많이 먹어서 체한 것도 아닌데, 그냥 배가 아프다 싶으면 한 병 마셨거든요. 어린 제 눈에는 약이라기보다 음료에 가까웠습니다. 병을 보면 ‘아, 배 아플 때 마시는 그거’ 하고 바로 알았죠.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물건인데도 저는 활명수의 이름이나 병에 붙은 부채표를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그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몇 번이나 “잉, 이게 그런 뜻이었어?” 하고 멈췄습니다.
배 아프면 떠올리던 그 병
어린 시절에는 배가 왜 아픈지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배가 아프면 활명수를 마셨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요. 지금의 제가 약을 고르는 방식과는 많이 다르죠. 그만큼 우리 집 일상에 익숙하게 들어와 있던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활명수가 1897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부터 놀라웠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대한제국이 세워지던 해였습니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민병호가 궁중에서 쓰이던 생약 비방을 일반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 활명수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 손에 들던 작은 병이 그렇게 먼 시간에서 왔다니, 갑자기 병의 무게가 달라 보였습니다.
부채표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활명수 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부채표입니다. 저는 그저 오래된 회사 표시쯤으로 여겼어요. 그런데 동화약품 기록을 보니 부채표는 1910년에 상표로 등록됐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활명수와 비슷한 이름의 제품이 여럿 나왔습니다. 이름만 보고는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릴 만했겠죠. 그래서 부채표는 제품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시가 됐습니다.
여기서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것도 하나 있었습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익숙한 문구까지 100여 년 전에 나온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동화약품은 그 문구를 내세운 부채표 캠페인이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합니다. 오래된 것은 부채표이고, 그 문구가 쓰인 시기는 그보다 훨씬 뒤였습니다.
오히려 그 차이를 알고 나니 더 재미있었습니다. 100년 넘게 이어진 표시가 시대가 바뀐 뒤에도 사람들에게 “이 표를 확인하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생명을 살리는 물’이 나라의 독립도 도왔다니
활명수라는 이름은 한자로 ‘생명을 살리는 물’ 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 이름을 소화제의 의미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활명수 판매 금액의 일부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화약품에 따르면 당시 회사가 있던 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던 서울 연통부가 설치됐습니다. 활명수 판매로 마련한 돈의 일부도 임시정부에 전달됐고요.
이 대목에서 한동안 병 사진을 다시 봤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마셨던 그 활명수가 누군가의 독립운동과도 연결돼 있었다니요.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이름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겹쳐 보였습니다.
이제는 부채표를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어린 제게 활명수는 그저 배가 아플 때 떠올리는 익숙한 병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1897년에 시작된 제품, 1910년에 등록된 부채표,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이어진 판매 기록이 함께 보입니다.
물건은 그대로인데, 제가 아는 이야기가 늘어나니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다음에 활명수 병을 보게 되면 저는 아마 부채표부터 찾을 것 같아요. 그리고 어린 시절의 저처럼, 그 병을 오래 보면서도 이런 이야기는 몰랐던 사람이 또 있을까 궁금해질 겁니다.
참고 자료
활명수의 탄생, 부채표 등록과 캠페인 시기, 서울 연통부 및 독립운동 자금에 관한 사실은 동화약품 ‘활명수 이야기’와 동화약품 ‘기네스북 등재’를 참고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제 개인적인 기억입니다.